오팔(OPAL) 세대, 올해의 10대 소비 키워드

이들 세대는 자식들에게 의존하는 기존의 베이비붐 세대들과 다르다. 베이비부머들은 그동안 밀레니얼 세대(1980~95년 출생자)나 Z세대(1995년 출생자)에 가려져 사회적이나 경제적으로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시니어 혹은 노년층 취급을 받으며 존재감 없이 살아왔던 게 사실이다.

지난해 김난도 서울대 교수가 ‘올해 10대 소비 키워드’ 중 하나로 ‘오팔(OPAL) 세대’를 지목하면서 이 베이비붐 세대가 주목받고 있다. 유행에 민감하기 때문에 젊은 층과 마찬가지로 자신만의 취향과 브랜드를 좇으며 새로운 소비 권력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OPAL’은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는 신노년층(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의 약자로, 베이비부머를 대표하는 58년 개띠를 의미한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10월 눈에 확 띄는 이벤트를 개최했다. 60대 이상 시니어만을 대상으로 모델을 선발하는 ‘시니어 패셔니스타 콘테스트’가 그것이다. 최근 60대 이상 고객의 라이프스타일이 변하면서 새로운 소비 주도층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들을 잡기 위해 시니어 모델 공개 오디션을 기획했다는 것이 현대백화점 측의 설명이다.

실제로 모델을 꿈꾸며 백화점 문화센터나 전문 아카데미를 두드리는 중장년층이 최근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지난 2016년까지만 해도 현대백화점 전국 15개 점포 문화센터에서 모델 워킹이나 자세 교정 등을 배우는 시니어 고객은 2,000여 명에 불과했다. 지난해에는 5,500여 명으로 3년 만에 2.5배나 증가했다. 올해는 지원자가 더욱 늘어날 것으로 회사 측은 기대하고 있다.

 

실제로 롯데와 신세계, 현대 등 백화점 3사에 따르면 최근 50대 이상의 소비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단순히 자산 대비 소비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컨템포러리 브랜드(최신 트렌드를 이끌고 있는 의류‧잡화 등의 상품군) 구매 비중이 높아졌다. 신세계백화점의 컨템포러리 브랜드 매출 비중은 50대가 42.9%로, 40대(32.7%)와 30대(20.7%)를 크게 압도했다. 특히 50대의 매출 비중이 해마다 커졌다. 2015년 36%에서 2019년 42.9%로 4년 만에 7%나 증가했다. 롯데백화점의 경우 타임 등 여성 캐릭터의류와 빈폴레이디스 등 트레디셔널 여성의류 구매의 50% 이상을 50대가 차지하기도 했다.

 

백화점 3사 매출 증가율, 50대 이상 1위

현대백화점의 경우 이 수치가 더 가파르다. 50대 이상의 컨템포러리 브랜드 매출 신장률은 지난해 15.1%를 기록했다. 현대백화점 공식 온라인몰인 더현대닷컴의 지난해 연령대별 매출 신장률을 분석한 결과, 60대 이상이 61.3%로 전체 1위를 차지했다. 시니어층의 ‘젊은 소비’ 트렌드가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김준영 현대백화점 상무는 “기존의 시니어층은 은퇴 이후 절약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자기 자신에 투자하고 유행에도 민감한 오팔 세대가 늘어나면서 컨템포러리 브랜드의 매출 비중도 매년 증가 추세”라면서 “최근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 사태 여파로 소비 전반이 주춤하고 있지만 오팔 세대의 잠재력은 여전하다고 본다. 이런 트렌드에 맞춰 다양한 마케팅 전략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오팔 세대 잡기 위해 기업 전략 대거 수정

오팔 세대는 인터넷과 모바일에도 능하다. 한국인터넷진흥원에 따르면 2019년 1분기 50대 이상 소비자의 월평균 데이터 이용량은 3.1GB다. 3년 전에 비해 2배 이상 증가했다. 이 때문에 주요 IT 기업들은 전략을 대폭 수정했다. 자사 상품 구성에서부터 콘텐츠, 심지어 광고와 마케팅 전략까지도 오팔 세대에 맞춰 조정한 것이다. 옥션이 대표적이다. 이 회사가 2014년부터 2018년 상반기까지 전 품목의 연령별 판매량을 분석한 결과, 50대와 60대의 증가율이 각각 130%와 171%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두 연령대의 고객 비중은 2014년 17%에서 2018년 27%로 크게 증가했다.

 

코로나19 사태가 한창이던 최근 상황도 비슷했다. 지난 2월 국내 온․오프라인 유통업체의 총 매출은 10조 6000억 원으로 집계됐다. 이 가운데 약 절반(49%)은 온라인 유통채널에서 매출이 발생했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9.2%포인트 증가한 수준이다.

눈에 띄는 사실은 중장년층의 온라인 소비가 크게 늘었다는 점이다. 시장조사기관 닐슨에 따르면 지난 2월 한 달간 중장년층(40~60대)의 온라인소비 증가율은 전년 동기 대비 약 156%나 급증했다. 2030세대의 증가율(33.3%)보다 무려 5배나 높은 수준이다. 그 동안 오팔 세대를 겨냥한 타깃 마케팅을 벌여온 G마켓과 옥션, G9(이베이코리아)은 덕분에 사상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을 기록할 수 있었다.

 

오팔 세대의 추억을 소환하라

패션그룹 세정은 오팔 세대의 ‘추억 소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최근 웰메이드 론칭 45주년을 맞아 자사의 대표 브랜드인 인디안의 시그니처 로고를 만들었는데, 초기 광고 콘셉트를 대거 차용했다. 반면 상품 구성은 차별화했다. 촌스러운 ‘아재’ 스타일에서 벗어나 젊고 세련된 분위기의 ‘블랙라벨 라인’을 선보였다. 주요 고객인 중장년층의 향수와 Z세대의 레트로를 동시에 불러내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대한제분의 밀가루 브랜드인 곰표는 심지어 남성의류 쇼핑몰 4XR과 협업해 ‘곰표 패딩’을 출시했다. 밀가루를 상징하는 하얀색 후드티에 곰표 밀가루를 새겼는데, 예상외로 큰 관심을 받았다는 평가다. 이 밖에도 리복은 오리지널 클래식 로고로 돌아섰고, 쿠팡은 노년층 맞춤 테마관인 ‘실버스토어’를 2018년부터 운영 중이다.

 

브랜드의 얼굴인 광고 모델도 많이 바뀌었다. 인기 스타 대신 신뢰도가 있는 시니어 모델을 영입해 로열티를 끌어올리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아웃도어 브랜드 코오롱스포츠는 국내 대표 배우인 김혜자씨를, 스트리트 캐주얼 브랜드 MLB가 1970년대 배우 문숙씨를 모델로 영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남성복 브랜드 캠브릿지멤버스는 1988년 1대 모델로 활약했던 배우 노주현을 최근 다시 기용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때 아닌 트로트 열풍에 광고계 ‘블루칩’으로

오팔 세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대중문화의 트렌드 역시 바뀌고 있다. 그 동안 트로트는 중장년층의 전유물이란 인식이 강했다. 관련 프로그램 역시 틀에 얽매였던 것이 사실이다. 최근 TV조선의 《미스트롯》과 《미스터트롯》으로 이어진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이 대박을 쳤다. 지하철 광고판에 임영웅과 이찬원이 등장했을 정도로 큰 인기를 모았다. 그 배경에는 덕질하는 중장년층의 역할이 컸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덕분에 《미스트롯》 ‘진’ 송가인은 광고계의 블루칩이 됐다. 삼겹살데이로 불리는 3월3일, 송가인은 ‘한돈송’을 부르며 한돈 홍보에 나섰다. 보해양조의 경우 ‘잎새주’ 광고 모델로 송가인을 발탁하기도 했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송가인을 잎새주 광고 모델로 기용한 잎새주의 1월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20% 가량 증가했다.

‘트로트 열풍’에 자극받은 빙그레는 최근 자사 아이스크림 제품인 슈퍼콘의 새 모델로 유산슬을 선정했다. 지난해 손흥민을 모델로 일렉트로닉 음악을 사용해 광고를 내보냈던 빙그레는 최근 트로트로 교체했다. 일명 ‘유벤져스’라 불리는 ‘박토벤’과 ‘정차르트’, ‘작신’이 부르는 ‘슈퍼콘송’ 제작 영상을 유튜브에 공개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전문가들 “오팔 세대 영향력 당분간 지속”

콘텐츠 시장도 변하고 있다. KT는 자막에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층을 위해 자사 IPTV에 맞춤형 외화더빙 서비스인 ‘룰루낭만’ 서비스를 추가했다. 라이나전성기재단은 최근 시니어 전문 포털을 오픈하면서 ‘퇴직한 다음날’이라는 이름의 유튜브 채널도 개설해 좋은 받응을 얻었다. 한화생명은 홍혜걸 의학전문기자 등과 협업해 의료 전문 콘텐츠 채널 ‘건강톡’을 운영 중이다.

 

전문가들은 오팔 세대의 영향력이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고 있다. 영화계나 음악계의 경우 ‘중장년층을 잡아야 빅히트가 터진다’는 말이 회자될 정도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경제적 풍요, 늘어난 수명으로 중년 이상 세대에게 문화적 욕구가 거세게 일어나고 있다”며 “이른바 ‘자기 배려’를 추구하는 오팔 세대를 중심으로 한 소비 트렌드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