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중부캠퍼스 「50+의 서재」에서 열리는 반달특강은 반 달,

2주에 한 번 명사들과 함께 다양한 주제를 갖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다.

지난 10월 30일 19시 <세계문화유산 화성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

인간존중과 창조의 공간이라는 제목으로

화성을 만든 진짜 이유와 정조를 알아보는 시간을

한신대학교 정조교양대학 김준혁 교수와 함께 했다.

 

 

 

 

“하루 한 꼭지씩 역사이야기를 해준 아버지, 늘 책 읽는 아버지 모습을 보며 자랐다. 정조가 만든 저수지, 논을 매일 보며 성곽을 따라 다녔다. 터전에서 살았기 때문에 정조를 연구하는 게 아닌가 주위사람들이 말한다.”는 김교수는 수원성곽 근처를 떠나지 않고 살아오는 자부심과 지인이 붙여준 ‘시골무사’라는 별칭이 싫지 않은 듯하다. 정조의 매력에 흠뻑 빠져 연구하게 된 이유를 굳이 밝히지 않아도 이해가 된다.

 

그는 서울대 규장각 자료 목록집 <범우고>를 보고 신기하다 생각했다. 아무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아서 조선 후기 불교정책을 석사 논문으로 썼다. <범우고>는 억불숭유(불교를 누르고 유교를 숭상)정책으로 승려들이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던 당시 현황파악을 위한 전체 절의 조사보고서이다. 부처님을 찬양하는 찬양문을 쓸 정도로 열려있는 생각을 많이 한 정조 때 사찰 70%가 중건되었다.

 

한번은 임금을 보러 온 선비가 돈화문 앞에서 대자로 누워 자는 일이 생겼다. 의금부에 가두었다는 보고를 듣고 정조는 “이런 기개 있는 선비가 있다니” 놀라워하며 격려와 하사금을 지급했다. 정조의 열려있는 사고와 호연지기를 엿볼 수 있는 사례다.

 

정조는 1798년 <천주실의>에서 남녀차별, 신분차별이 없는 평등을 보고 놀랐다. “천주학을 믿는 이유는 우리가 잘못해서다. 고통을 해결해주지 못해 탈출구로 천주학을 믿는 것이다. 서학의 사랑은 유교의 인(人)과 같다”고 생각했다.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했기 때문에 실학이라는 사상이 발전되었다. 정조를 이해하기위해 기저에 깔려야 하는 대목이다.

 

정조는 1791년 김홍도에게 군복과 전립을 쓴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했다. 7개 정도 그렸지만 남아있지 않다. 2006년 영조 초상화가 남아 있어 의도하여 그려졌다. 이석영의 큰아버지 이유언은 사도세자와 철종의 군복 입은 모습대로 정조 초상화의 하부를 그리게 했다는 글을 썼다.

 

정조시대는 기회를 균등하게 주려했고 훈민정음을 잘 활용한 시기다. 조정편찬 언해본 90%가 편찬됐다. 해당 고을에 30살 넘은 남녀가 혼자 살게 되면 고을 수령을 파직시키는 특별법을 만들었다. 돈 없어 결혼을 못할 때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찾아다니며 결혼을 시켜줘야 한다는 내용을 훈민정음으로 만들었다.

 

또한 무과 시험에 서로 교전하는 설명이 한자로 되어 있는 것을 훈민정음으로 만들어 배포했다. 무예도보통지를 읽고 언해본으로 공부한 평민들이 새로운 신분층을 형성하게 된다. 정조는 이렇게 신분을 벗어날 기회를 균등하게 주면서 균형 발전시켰던 것이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날듯이 문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의지가 군복을 입은 어진 속 정조의 모습에 그려져 있다.

 

 

 
정조대왕 어진(융복,전립)

 


다산 정약용

 

 

정조는 화성축성을 결정하고 기본 설계를 건축학자, 수학자, 토목 학자였던 정약용에게 의뢰했다. 정조와 창덕궁 선정전에서 성균관 유생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처음 만나서 최측근이 된 다산 정약용 집안은 사도세자의 죽음을 반대하고 슬퍼했던 남인이다.
중국으로 이동우를 보내 말 590필에 책을 싣고 오게 하며 새로운 것들을 과감히 도입했다. <기기도설>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책을 그의 제자인 예수회 소속 트렌스 신부가 중국어로 번역한 책이다. 다산이 이를 보고 거중기를 만들었다.
1786년 “나에 대한 어떤 비방도 용서하겠다.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대책을 올려라”는 정조에게 “중국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라. 수레 다니게 길을 닦아야한다. 전하가 용기가 없다.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이는 것에 왜 두려워하느냐. 서양 선교사를 받아들여라”고 박제가는 요청한다. “조금만 기다려라”며 그를 다독였다. 6년 뒤 기기도설을 인용해 조선의 도르래 기법의 거중기를 만들었다. 엄청난 용기였다. 정조의 용기며 다산의 또 다른 용기였다.

 


 화성전도(화성성역의궤)

 


기기도설

 

 

정조의 사람에 대한 배려는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규장각 부용지에서 있던 일이다. “고기 잡는 사람한테 상(술)을 주고 잡지 못한 사람에게 벌(유배)을 주겠다.”며 부용지에서 왕과 함께  술 마시는 것을 보게 한다. 또 왕실의 등을 가지고 불을 밝혀 집에 가게하거나 조선건국이래 신하들이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옥류천을 일 년에 한 번씩 산책을 하며 자신의 공간을 신하들과 함께 나눈다.

 

“나는 미천한 마부에게조차 이놈 저놈 해 본 적이 없다. 노비보다 슬픈 존재는 없다. 노비는 혁파되어야 한다. “고 말하는 정조는 사람을 살린 게 한 둘이 아니었다.

 

화성 동쪽 대문에 있는 공사 실명판에 대해 “후대 사람들에게 기억에 남게 하려는 것이다. 기록을 남기면 백성을 위해 일했던 사람으로 기억 될 것이다. 좋은 기억으로 남길 원한다. 기억하게 해주는 것만큼 기분 좋거나 감사한 것은 없다. 석수가 이병한이란 것을 어찌 알까! 돌에다 새기면 영원히 우리한테 기억되는 것이다. 기술자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돌이 가진 가치는 인간에 대한 기본 예의였다.


화성 건축 시 패장제도를 만들어 기술자들의 우두머리에게 대장 직책을 줘 실질적 권한을 주었다. 미천한 마부나 하급 직원도 이름과 관직을 함께 불러 주었다. 가장 현명한 사람을 뽑아서 일하게 하는 민주주의 방식으로 뽑힌 책임자 마름은 쌀 1가마 받는 상위직책보다 쌀 2가마를 더 받았다. “많이 배우고 지위 높은 사람에게 돈을 주는 것이 아닌 일 많이 한 사람이 많이 가져야한다”며 경제 민주화가 제대로 된 사회를 만들려고 했다. 당시 백성들은 이런 임금과 함께 일했던 것을 즐거워했다.

 

“너무 잘 들어주셔서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김준혁 교수는 정조의 말씀, 행동, 실천에 감명을 받아 정조이야기를 해달라는 곳은 어디든 간다는 평생소원이 생겼다고 한다. 저서인 「화성」제목의 책 세권을 준비했다며 질문을 받았다. ‘다산 정약용의 신앙문제’ ‘신하들한테 비속어를 썼다는데 맞는가?’ ‘정조 독살설의 미스터리’ 세 가지 질문이 나왔다. “배교한 인물”  ”낮의 정치, 밤의 정치가 있지 않나 정조는 아재 개그의 일인자이다“ ”의료사고 설 , 과로사 설, 독살설‘로 질문에 대한 정리를 해주었다. 

 

 


거중기

 

 

특강이 시작되기 한 시간 전부터 온 전미애 씨는 “역사에 관심이 많아 일부러 찾아와 듣는다. 오늘은 커뮤니티 활동이 5시에 끝났는데 기다리다 왔다. 남자 분들이 많네요. 역사라서~”라며 지난 특강 때 강사와 사진촬영을 했다고 자랑했다. 오늘도 기대하는 눈치다. “화성에 관심이 많아서” 라는 짧은 답변을 시작으로 “집이 가깝다. 이렇게 좋은 강의를 듣게 되어 너무 좋다. 처음 와봤는데 캠퍼스 시설도 너무 좋다.” “강사가 정조의 진짜 전문가다.”라는 소감을 듣고 나니 많은 50+세대들에게 반달특강은 중부캠퍼스의 또 다른 얼굴로 감동을 주고 있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정조의 이야기는 「50+서재」 창밖의 어둠을 뚫고 혜성처럼 빛나는 별 조각들이었다.

정조의 따스한 보살핌이 세월을 넘어서 우리에게 전달된 걸까?

유난히도 추운 가을 밤,

정조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은

정조의 세심한 배려의 코트를 입은 듯

마음의 온기가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