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통해 위안을 공유하는 시간
5월 23일 <사이특강> 취재차 서대문50플러스센터를 찾았다.
“책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다”는 뜻의 특강 이름 ‘사이’에서 손끝을 통해 연결되는 느낌이 났다.
5월 사이특강의 제목은 <한양도성을 걷고 그리다>로 유튜브 라이브로 진행하는 온라인 강좌다. 강사는 『오래된 길들로부터의 위안』의 저자 이호정, 학부와 대학원에서 도시공학을 전공하고 오랫동안 이 분야에서 종사하며 내공을 쌓았다. ‘가장 빠르게 변화한 거대 도시 서울에서 가장 느리게 흘러가는 옛길과 옛 동네를 걸으며 마주친 오래된 풍경’으로부터 작가는 위안을 받았다고 한다.
▲서대문50플러스센터 온라인 전용 강의실 모습.
강의는 오후 두 시부터 한 시간으로 예정되어 있다. 코로나로 인해 비대면 온라인 강의 방식에 아주 익숙해졌다고들 하지만 시간이 다가올수록 긴장감은 높아진다. 속속 수강생들이 입장하며 유튜브 창에 인사말을 올린다.
아름다운 경치란 그림과 같다.
큐 사인을 날리자 떨린다며 걱정을 하던 모습과는 달리 이호정 강사는 침착하게 강의를 시작했다. 먼저 조선 중기 문신 김수증의 은거지(강원도 화천 사내면)를 그린 <곡운구곡도>를 소개했다. 김수증은 자신이 살던 곳을 주희의 ‘무이구곡’에서 이름을 따 ‘곡운구곡’이라 이름을 지었고 화가 조세걸에게 그 경치를 그리게 했다. 김수증의 조카 농암 김창엽은 발문에서 ‘아름다운 경치란 그림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림 같은 경치와 이 현실을 담은 그림 안에 내포된 힐링 포인트가 연결되며 오늘 강의의 흐름을 짐작하게 한다. 탁월한 인트로다.
▲곡운구곡도 농수정_조세걸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 같은 한양도성
한양도성에 대한 소개가 이어졌다. 태조실록에 실린 기사 “엄내외 고방국(嚴內外 固邦國), 안팎을 엄하게 가르고 나라를 공고히 하다”를 인용하며 왕도의 권위를 나타내는 표상이 바로 한양도성임을 설명하였다. 성을 쌓고 문을 만들고 문을 여는 시간과 닫는 시간이 정해짐에 따라 도성은 도성 사람들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내사산(內四山, 한양도성을 쌓은 네 개의 산, 백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에서 내려온 물길을 따라 길이 형성되고 사람들이 모이고 집이 들어섰다. 살구꽃이 유명했던 필운대와 인왕산부터 복사꽃 북정마을까지 도성의 풍경은 그림으로 많이 남아있다.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와 강희안의 ‘인왕산도’에 이어 진경산수화의 현대판 같은 작가의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인왕제색도_겸재 정선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위안을 찾아 길을 나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득공이 지은 『경도잡지』와 그의 아들 유본예의 『한경지략』에 소개된 ‘순성 놀이’가 2007년 청와대 뒤쪽 백악 구간이 개방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서울시에서는 성곽 둘레길을 조성하여 예전의 순성 놀이를 체험할 수 있게 했고 기자도 혼자서 혹은 여럿이서 성곽을 따라 걸어보곤 했다.
치열한 삶 속에 찾아온 휴식기의 어느 날, 지금 너무 주춤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 즈음 작가는 예전에 답사 다녔던 길들을 떠올렸다. 초등학교 1학년, 2학년 연년생 남매를 데리고 벗들과 함께 걸었던 그 길을 다시 찾아 나섰다. 2017년 6월 3일이었다. 그 후 5년 동안 일요일마다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아이들과 답사를 다녔고 그림을 그렸고 『오래된 길들로부터의 위안』이라는 책이 되어 나왔다.
▲서대문50플러스센터 강의실에서 온라인 사이특강을 진행하고 있는 이호정 작가.
한양도성을 함께 걷고 그림을 통해 위안을 받다
시간 내내 옛 그림과 현재의 풍경,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옥인동 시범아파트 철거된 자리에서 발견한 돌다리가 바로 겸재 정선의 <수성동> 그림 속에 있는 그 다리였다는 드라마틱 한 이야기부터 윤동주 문학관의 건립 일화 등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당시의 광경들, 그 속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홍지문과 탕춘대성, 청계천과 오간수문 이야기를 따라 한양도성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실시간으로 올라온 유튜브 댓글로 강의에 대한 뜨거운 몰입도를 짐작할 수 있다.
▲유튜브 라이브로 열린 실시간 강의 장면을 담은 필자의 휴대전화 화면.
“내가 사는 동네가 나와서 너무 반갑네요”, “자주 가는 곳”이라는 말부터, “어쩜 그림을 이렇게 잘 그렸어요?” 등 공감하는 댓글이 넘쳐났다. 한 시간이 후딱 지났으나 아직 작가가 준비한 그림 자료들이 많이 남았다. 양해를 구하고 준비한 그림을 다 보여주기로 했다.
십여 분을 더하고 강의를 마무리한 다음 채팅창에 올라온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옛 그림의 출처부터 작가가 사용하는 그림물감과 그리기 기법에 대한 질문까지 이어졌다. 국산인 신한 물감을 쓰고, 그림 한 장을 그리고 나면 지우개 가루가 한 컵이 나올 정도로 반복해서 수정했고 색칠도 보통 대여섯 번을 했기 때문에 두꺼운 두께의 종이를 사용했단다.
강의 제목처럼 한양도성을 걷고 그림을 그린 시간이었다. 작가가 답사를 다니고 그림을 그린 그 시간과 감정을 공유하고 위안을 받았다.
에필로그
▲저서 『오래된 길들로부터의 위안』에 서명하는 이호정 작가
질의응답이 끝났어도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 센터에서 수강생 중 열 명을 뽑아 작가의 책을 증정하기 때문이다.
책 한 권 한 권 정성스럽게 서명을 하는 작가의 모습에 혼심의 힘을 다해 스케치를 완성하는 열중이 느껴졌다. 드디어 기자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50+ 시민기자단과 이호정 작가의 인터뷰 장면
어떻게 이런 수준의 세밀한 수채화를 그리게 되었냐고 물었다. 그림을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소질은 있었던 모양이다. 대학 도시설계 전공 수업 과제물을 보고 담당 교수가 “너는 하산해도 되겠다”라고 하였단다. 말은 그래도 끊임없이 반복한 훈련과 노력의 결과이다. 답사 처음 1년간은 끊임없이 스케치를 그리고 지우고 다시 그렸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그림 한 장을 그리고 나면 지우개 가루가 종이컵 하나에 가득 찼다고 한다.
휴일 오전 11시에 집을 나서서 저녁 8시 넘어 돌아오기를 5년, 집에 돌아가는 길 지하철에서 꾸벅꾸벅 조는 아이들 목덜미에 배어있는 땟국물 자국을 보며 작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이들을 씻기고 재우고 나서야 마주한 오롯한 나의 시간, 작가는 지나온 길, 마주친 사람과 풍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피곤함을 잊고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했다. 그 풍경을 생각하면 절로 감동의 느낌이 살아나고 힐링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아이들은 중학생이 되었다. 사족 같지만 작가의 글귀 하나 덧붙여야겠다.
코끝을 스쳐 가는 겨울바람조차 차갑지 않았던 그해 겨울 우리는 돌담길을 따라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