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플러스 빛나는 인생 2막”
나의 출입처, 강동50플러스센터 복도에 들어서면 아담한 사인물에 선명히 들어선 로고스!
맞다, 누군가에겐 ‘빛나는’ 50플러스인가 하면 누군가에겐 ‘빚내는’ 50마이너스다.
▲ 강동50플러스센터 사인물
그 요체는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이 갈수록 발전과 달라지는 모습이다.
만나고 헤어진 뒤 사흘 지나 보면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한다는 ‘괄목상대(刮目相對)’의 고사가 중국 고대 <삼국지>에 나오는 말이라면, 스마트폰과 초연결의 시대 현대인들에게는 3시간 후에 만나면 눈 비비고 다시 봐야 할 정도로 배움이나 덕행이 발전되어야 하지 않을까?
‘스마트폰으로 그리는 감성 풍경화’를 스케치하는 순간 호모스마트쿠스(Homosmartcus) 시대를 살고 있는 내가 문득 박제(剝製)되어 버린 로빈슨 크루소를 대하는 기분이다.
이제껏 내 폰은 스마트보다는 기껏해야 페이스북에 동영상, ‘톡톡’대며 알뜰하게 놀리고 있었음을 고백해야겠다.
▲ 스마트폰 그림그리기 삼매경
아브젝시옹(abjection)
천재 장인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이란 ‘돌 속에 갇혀 있는 천사를 꺼내는 작업(the angel in the marble and carved until I set him free)’이었다.
“Smartphone that is not Smartphone!” 지금껏 대다수 아재들에게 스마트폰은 전화기에다 SNS 매개체 거기다가 사진기 그 정도면 과분했다. 그렇다면 알뜰한 사양과 뭐가 다를까?
스마트폰 너머의 베일을 벗기는 커밍아웃, 마치 통신기기에서 보물을 꺼내는 작업은 현대판 아브젝시옹이다.
이젠 스케치북이나 팔레트, 붓이나 화선지도 필요 없다. 스마트폰에서 ‘그림그리기’ 앱을 깔고 들어가니 캔버스의 선택에서부터 ‘명도’, ‘채도’, ‘색상’ 같은 오래된 단어들이 떠오른다. 자연 풍경을 바탕으로 나만의 감성 풍경화를 그려 나간다는 점에서 이는 ‘아우라(AURA)의 몰락’이 아닌 아우라의 확장이다.
▲ 아우라의 확장
일찍이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에 전통 회화 같은 예술품이 지닌 유일무이한 진품성이 각종 기기의 발달로 그 ‘아우라’가 사라진다고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브르박물관의 ‘모나리자’나 대체 불가능 ‘NFT’ 역시 진품, 명품, 오리지널의 아우라는 따로 있기 마련이다. 모나리자의 모델이 된 여성 역시 태초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들 때 그것 역시 하나님의 ‘형상’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풍경은 문자 그대로 ‘포이에마(ποίημα)’, 만들어진 바이기 때문이다.
손가락이 가는 대로 그리고 맘이 틀리면 Delete, 참 쉽~제이!
하지만 강사 선생님의 미로 같은 설명에도 전혀 헤매지 않고 곧장 잘 따라 그리는 50플러스. 우연하게도 수강생들은 모두 여성들이었다. 그 많은 아재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아재 눈에는 대충 짐작해도 따라 그리는 작업의 효과란 창작성 배가는 물론 치매나 졸음이 확연히 줄어들 것으로 확신한다.
본캐가 전시업무라는 송용민 여사(55)의 능숙한 손질에서 예술의 장르는 일맥상통함을 느낄 수 있었다. 알아야 ‘면장(免牆)’ 한다는 말처럼 무엇인가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야 답답함을 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녀는 익어갈수록 배우는 것에서 소소한 재미를 느낀다고 한다. 취미를 확장하고 그 속에서 또 다른 나를 발견하고 만남의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것은 50플러스 놀이터의 색다른 덤이다.
▲ 또 하나의 전시를 기획하는 송용민 씨의 부캐
강동50플러스센터의 문을 벗어나면서 문득 이순(耳順)플러스의 에고에다 묻는다.
“나의 삶은 지금 ‘빛’인가, ‘빚’인가?”
50+시민기자단 황용필 기자 (yphwang@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