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비가 많던 후덥지근한 여름이 처서(處署)를 지나면서 꼬리를 내리고, 마루 밑으로 숨어든다. 한국의 가을은 바스러지듯이 파란 쪽빛 하늘이다. 가을하늘을 그저 푸르다고 하면 무미건조하다. 쪽빛 하늘이라고 해야 그 감칠맛이 우러나온다.
▲ 가을 하늘
쪽빛은 쪽에서 나온 청색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푸른색이 쪽에서 나왔지만, 더 푸르다는 의미이다. 쪽빛, 남색(藍色)은 영어로 인디고(Indigo)이다. 유럽에 청색 염료가 귀했던 근대시대, 인도에서 쪽으로 염료를 추출하여 가져오자, 인도로 가면 얻는다고 해서 인디고가 되었다.
독일의 화학회사 바스프(BASF)가 1868년 인디고를 인공으로 합성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이로써 청색 염색이 쉬워지고, 청바지가 인기를 끌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 픽사베이
쪽이란 식물은 세계적으로 5종류가 있지만, 인도의 쪽이 제일 흔하고 유명하다. 인도는 나무이고, 우리나라는 풀이다. ‘청대’라고도 한다. 이 식물을 키워 생쪽 염색을 하거나, 발효시켜 염색한다.
▲ 인디고 나무로 청색 염료를 만들었다. ⓒ 타밀 식물자료
8월 18일 늦더위를 밟으면서 강서50플러스센터에 쪽 염색을 배우기 위해 수강생들이 모여든다. 민보경 씨는 중국 구이저우성을 여행할 때 천연 염색하는 걸 보고 마음을 빼앗겼다고 한다. 마침 강서50플러스센터에서 쪽 염색 강의가 열려 한걸음에 달려왔다.
25년 이상 쪽 염색에 미쳐 사는 ‘어름박골 쪽빛나라’의 김성동 강사는 쪽빛의 유래에 대하여 알려준다. “쪽빛은 한밤중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 어둠을 물리치고 새벽을 여는 파란색이에요. 단군 신화에도 푸른 옷을 입었다고 나와요.” 한지를 쪽으로 염색하여 천년 간 보존해 올 정도로 쪽의 역사는 깊다.
▲ 쪽빛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새벽빛이다. ⓒ 픽사베이
쪽은 예로부터 염색만이 아니라 약으로도 많이 사용해 왔다. 쪽 염색한 옷을 입으면 땀 냄새를 흡수하며,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체온을 보존하여준다고 한다. 수강생들은 연신 “그런 효과가 있었어?” 하면서 새삼 쪽에 대하여 감탄한다. 아토피나 알레르기 있는 사람에게 특히 효과가 좋다고 한다.
▲ 김성동 강사의 설명에 집중하는 수강생들.
천연 염색을 이곳저곳에서 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쪽 염색은 인간문화재가 있다. 그만큼 염색 과정이 까다롭고, 천연 발효 기술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값싸고 편리한 화학 염료가 대량 사용되면서 쪽은 6.25전쟁 후 20년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 몇몇 장인들이 쪽 염색을 되살리기 위해 일본에서 쪽 씨앗을 가져와 다시 재배하기 시작했다.
▲ 쪽
쪽은 3월에 씨앗을 직파하여 모종을 키운다. 5월에 모종을 밭에 이식하여 키워서 7월 말에 1차 베기를 하고, 9월 중순에 2차 베기를 한다. 그래서 생쪽 염색은 이때만 가능하다. 쪽은 잎이 다른 식물과 같이 녹색이지만, 투명한 색소(인디칸)가 그 속에 들어있다. 잎이 마르면 보통 식물은 누렇게 변하지만, 쪽은 색소 때문에 까맣게 된다.
쪽 염색의 발효를 수강생들이 체험하도록 김성동 강사는 준비해 온 니람(泥藍)으로 염색물을 만든다. 그런데 막걸리와 물엿이 준비되어 있다. 염색에 막걸리가 필요하다니. 막걸리도 생막걸리라야지 살균 막걸리는 소용이 없다고 한다. 막걸리에 있는 효모가 발효 작용을 잘하도록 먹이인 물엿을 넣어준다. 쪽 염색에는 잿물과 조개 곱게 간 것도 함께 필요하다. 김 강사가 꼬막을 곱게 갈았다고 하는데 너무 뽀얀 가루이다. 너도나도 조개라고 믿어지지 않는지 손가락으로 찍어 본다.
▲ 염색물 만들기
쪽 염색을 한 옷을 보면 동일 색상이 아니다. 모든 색은 숫자로 표시된 색상 코드가 있는데 쪽도 있을까? 인디고의 색상 코드는 ‘#4b0082’이다. 한국의 쪽도 이렇게 표시할 수 있을까. 쪽빛 염색은 색소(니람)를 만들고, 발효 후 장인의 손을 거쳐 쪽 염색을 한다. 한국의 음식 맛이 손맛마다 다르듯이 쪽빛도 염색하는 사람마다 다르지 않을까. 열심히 배우는 수강생들이 저마다의 쪽빛을 만들어 염색한 모습이 배움의 열기 위로 아련히 그려진다.
50+시민기자단 남영준 기자 (bransontiki@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