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덴스가 사피엔스를 이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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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강 ‘영화로 들여다보는 호모루덴스’에 참여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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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떠나지 못한 여행. 11월 중순의 뉴스가 무착륙 국제 관광 비행이었을 정도로 올 한 해 우리는 모두 여행에 목말라 있었다. 우리가 그토록 여행을 떠나고 싶은 건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렀기에 생기는 본능적인 열망 때문이다. 여기 아닌 저기, 시간과 공간이 다른 곳을 다녀오면 기분은 말할 것도 없고, 새로운 자극을 받아 에너지를 충전시킬 수 있으니 기회만 된다면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건 당연하다.
여행의 양상과 방식은 다양하다. 나를 낯선 곳에서 만나는 방식으로서의 여행이라면 새로운 일에 도전하거나 마음을 만나는 명상 같은 것도 여행이 된다. 약간의 기분전환을 위해서라면 관심 끄는 문화 행사에 참여하는 것도 여행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어딘가로 떠나지 않아도 시간만으로 떠날 수 있는 여행이 있다면? 서울시50플러스 중부캠퍼스에서 마련한 ‘랜선 문화예술 기행’이 바로 그런 여행이다. 혼자 떠나지만 비슷한 마음의 여럿을 만날 수도 있다. 여행 당일, 15시 시작을 앞두고 이미 비대면으로 100명 가까이 대기 중이었고, 이후로도 160명가량이 될 때까지 입장이 이어졌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랜선에 익숙해진 50+세대들인 만큼 유튜브 Live에서 떠나는 영화 여행은 마음 한가득 설렘을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여행 가이드를 맡아줄 강사가 한때 우리에게 친숙했던 이름이어서 실시간 채팅에 올라온 ‘강의가 기대된다’는 댓글도 마음을 부풀게 했다.
강사로 나선 이는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유지나 교수로, 그녀가 내건 ‘호모 루덴스 프로젝트’의 부제는 ‘걸림돌을 디딤돌로, 한(恨)을 흥(興)으로’였다. 영화와 루덴스? 학술적인 개념이 영화와 만나면 상상력이 한층 커지지 않을까? 곧바로 유 교수의 ‘랜선 여행’이 시작되었다.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통해 다양한 이야기와 함께, 그동안 변해온 우리 사회의 풍속도가 화면으로 나타났다. 1인 가구의 증가 추세, 욜로· 혼바비언 같은 말이나 세대별/성별 혐오 표현이 많아진 것도 놀랄 만한 변화다. 19세기부터 21세기 현재까지 계속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가치관이나 습속은 예전 방식에 얽매여 있는 우리 사회. 코로나블루까지 겪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우울하게 지낼 것인가? 코로나19를 계기로 이제 루덴스 프로젝트가 필요해졌다.
네덜란드 역사가 하위징아의 ‘호모 루덴스’(‘놀이하는 인간’이라는 의미)는 21세기 문화 우위의 시대와 어울리는 개념이다. 전통 사회에서 중시했던 이성적 존재로서의 ‘호모 사피엔스’를 뛰어넘는 루덴스야말로 최근 우리 사회에서 주목받은 ‘워라밸’의 라이프 스타일과 맞닿는 존재다. 일할 때는 생각이 필요하고, 일상에서는 쉼/놀이가 필요하다. 이 둘 간의 균형이 컨택트과 언택트/온택트에서 찾아질지도 모른다.
대면 접촉이 비대면으로 진행되면 무엇이 달라질까? 어느새 일상이 되어버린 언택트(비대면)로 만든 온택트(화상 대면)는 무엇이 좋을까? 예전과 달리, 의무적인 회식 같은 건 안 해도 되고, 랜선으로 만나는 ‘랜선 프렌드’가 많아지고, 홀로 지내는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가장 좋은 친구로 사귀는 기회가 생긴다. 개인화에 맞게 다양한 방식으로 사는 일이 가능해진 것이다.
스스로와 친구가 되는 ‘자기 공감’의 순간, 곁에 있는 소소한 것들과도 쉽게 친구가 되는 경험은 (예술적인) 놀이에 속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다양한 직업들이 교체되면서 무엇보다 창의성이 중요해졌다. (부제의 표현대로) 불편한 걸림돌을 디딤돌로 쓰는 것도 창의성의 발현, 즉 예술이다. “아는 것이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이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로 대변되는 우리 안의 자발적 놀이야말로 예술인 동시에, 코로나블루를 치유하는 최고의 해독제인 것이다.
유 교수는 지금의 현실과 그리 멀지 않은 영화를 소개하면서 영화와 현실은 서로를 보완한다는 사실을 피력했다. 를 비롯한 <엑스 마키나> <그녀> <로보캅> 같은 영화는 이제 현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아 보인다. 강의 서두에 소개한 <컨테이전> 역시 공감할 만한 영화다. 그 밖에 <언터처블> <반 고흐> <라비앙 로즈> <로큰롤 인생> 등은 유 교수가 루덴스 영화로 꼽은 타이틀로, 다양한 영화가 랜선 여행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1시간여 강의 뒤 잠깐의 휴식 시간을 거쳐 마련된 ‘영화 토크’ 시간, 시작의 문을 열었던 강기영 모더레이터가 다시 등장해 유 교수와 함께 못다 한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으로 90분간의 랜선 여행은 막을 내렸다.
우리는 공감으로 공존한다. 개인보다 집단이 중요했을 때 우리 시선은 호모 사피엔스로 향했지만, 개인화가 진행되는 현대사회에서는 다른 시선이 필요해졌다. 우리는 변해가는 존재니까. 인간을 지칭하는 수많은 이름 중 사피엔스와 루덴스는 현재의 우리를 대변하는 학명이지만, 이 외에도 발견해낼 이름이 많을 듯하다.
정보사회와 제4차 산업혁명을 분명히 실감하게 된 2020년 현재, 우리는 우리가 상상한 만큼의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목도 중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도 우리가 상상하는 능력에 비례한 사회를 만들어가게 될 텐데, 우리는 무엇을 상상해볼 수 있을까?
사피엔스와 루덴스는 경쟁자가 아니다. 시대마다 다르게 조명될 무수한 인간 종의 단면적 캐릭터일 뿐이다. 사회적 노동과 개인적 놀이 간 균형을 맞추듯, 우리는 이 둘을 이어주는 파베르(‘도구적 인간’이라는 뜻)를 다시 불러낼 수도 있다. 생명체가 세포분열로 성장하듯이, 우리 호모 종 역시 세분화를 통해 생각과 놀이를 이어주는 도구를 창의적으로 활용한다면 지금 여기를 지나면서 ‘차원이 달라진 컨택트의 시대’를 맞이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