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만나다
목요일 밤이면 중부캠퍼스 4층은 그리스 신화의 원전을 파헤치는 소리들로 가득하다. 테티스, 아킬레우스, 파리스, 아가멤논, 파트로클로스, 헥토르 등 복잡하기 그지없는 등장인물들의 계보를 따라 막장드라마를 능가할 이야기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펼쳐지는 <일리아스>의 내용을 이리 곱씹고 저리 풀어내는 강의를 듣다보면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만다. 텍스트로 빼곡한 수업 자료에는 수강생들의 깨알 같은 메모가 덧붙여지기 십상이다. 원전을 보다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중세의 프레스코와 루벤스의 그림을 감상하기도 하고 작품을 각색한 영화를 보기도 한다. 그렇게 「50+신화탐구-고전탐구반」의 시간은 소리 없이 그리스 시대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간다. 5월 11일 <일리아스>를 만났던 그 몰입의 시간을 복기한다.
<일리아스>는 분노의 책!
분노는 꿀처럼 달콤하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불멸의 고전 <일리아스>에서 만나는 분노의 힘
방대한 분량과 달리 <일리아스>의 줄거리는 의외로 간단하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치명적 아름다움을 가진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사랑에 빠져 야반도주를 한다. 헬레네의 남편 메넬라오스가 자신의 형 아가멤논을 찾아가 부인을 찾아달라고 징징거리자 아가멤논 왕이 그리스 연합군을 만들어 트로이와 전쟁을 한다는 내용이다. 트로이 전쟁 하면 트로이의 목마가 떠오르지만 사실 <일리아스>에는 트로이 목마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좌부터) 메넬라오스, 헬레네의 남편/ 파리스, 트로이의 왕자/ 디오메데스, 그리스 연합군 지휘자/
오디세우스/ 네스트로, 그리스 연합군 / 아킬레우스, 일리아스 주인공 / 아가멤논, 그리스 총사령관
아가멤논과의 갈등 : 사랑하는 여인을 뺏긴 아킬레우스의 분노
정작 <일리아스>는 주인공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사이에 생긴 불화로부터 시작한다. 전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그리스 전쟁 영웅 아킬레우스는 사랑하는 여인 브리세이스를 아가멤논에게 빼앗긴다. 자신의 명예가 훼손괸 것에 분노한 그는 아가멤논을 향해 칼을 빼지만 신들에 의해 제지된다. 그러자 더 이상은 아가멤논을 위해 싸울 수 없다고 선언하고 막사에 틀어박혀 지낸다. 아킬레우스가 빠지자 전세는 급격히 역전되고 때마침 나타난 트로이의 용장 헥토르는 승리에 승리를 거듭하며 그리스를 턱밑까지 추격한다.
▲아킬레우스에게서브리세이스를 빼앗는 아가멤논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 친구를 잃은 아킬레우스의 분노
막사에서 빈둥대는 아킬레우스를 설득하던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그의 고집을 꺾지 못한 채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전투에 나갔다가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친구의 시신을 마주한 아킬레우스는 얼굴에 흙먼지를 뿌리며 통곡한다. 아킬레우스의 마음은 이제 아가멤논이 아닌 헥토르를 향한 복수심으로 불타오른다. 거대한 분노에 휩싸인 아킬레우스는 모든 트로이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헥토르를 죽이고, 시체를 전차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며 승리의 기쁨을 과시한다.
“아아, 이제야말로 신들이 나를 죽음으로 부르는구나.
이제 사악한 죽음이 가까이 있고 더 이상 멀리 있지 않으니 피할 길이 없구나.
....(중략)
그러나 내 결코 싸우지도 않고 명성도 없이 죽고 싶지 않으니
후세 사람들도 들어서 알게 될 큰일을 하고 나서 죽으리라“
- 헥토르의 마지막 독백
▲헥토르의 시체를 전차에 매달아 질질 끌고 다니며 승리를 만끽하는 아킬레우스, <아킬레우스의 개선(1892)> 프란츠 마츠
헥토르의 죽음 : 아들을 향한 프리아모스의 절절한 사랑
헥토르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아들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아킬레우스를 찾아간다. 아들에 대한 절절한 사랑 하나로 모든 체면과 권위를 내려놓고 아킬레우스 앞에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애원한다.
“나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오.
드넓은 트로이에서 나는 가장 훌륭한 아들들을 낳았건만 그중 한 명도 안 남았으니 말이오.
....(중략)
아킬레우스여!
신을 두려워하고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여 나를 동정 하시오.
나는 그분보다 더 동정 받아 마땅하오.
나는 세상의 어떤 사람도 차마 못한 짓을 하고 있지 않소!
내 자식들을 죽인 사람의 얼굴에 손을 내밀고 있으니 말이오.”
▲(좌) <프리아모스의 간청(1824)> 알렉산더 이바노프
(우) 아킬레우스에게 무릎 꿇고 아들 헥토르의 시체를 돌려달라고 간청하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
프리아모스의 애원에 가슴이 미어진 아킬레우스는 눈물을 흘린다. 아들을 잃은 프리아모스와 오랜 친구를 잃은 아킬레우스는 서로의 운명을 한탄하며 함께 통곡한다.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주며 장례가 끝날 때까지 휴전하겠다고 약속한다. 사랑이 분노를 이기는 순간이며 분노의 최고조에서 아킬레우스의 인간성이 회복되는 반전을 보여준다.
헥토르의 장례식과 함께 <일리아드>는 마무리된다. 트로이 전쟁의 남은 이야기는 호메로스의 다른 작품 <오딧세이아>나 다른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완성되고 있다.
<일리아스>에서 만나는 인간의 자유의지
호메로스적 인간, 아킬레우스의 선택
아킬레우스의 죽음 : 삶의 유한성
천하무적의 아킬레우스도 죽음을 맞는다. 그런데 그 모습은 용맹한 전쟁 영웅의 최후라기엔 어딘가 싱거워 보이기까지 한다. 아킬레우스는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인간 펠레우스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다. 테티스는 어린 아킬레우스를 스틱스((Styx)강에 몸을 담가 불멸의 몸을 만들지만 손으로 잡고 있던 발꿈치 부분만 강물에 닿지 않았다. 결국 그리스 최고의 전사, 거의 불멸에 가까운 아킬레우스는 파리스가 쏜 화살에 뒤꿈치를 맞아 죽음을 맞는다. 이로부터 그 유명한 아킬레스 건(Archilles’ Hill)이 유래하고 있으며 불멸에 가까운 힘을 가진 아킬레우스도 결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유한성’을 보여 준다.
▲(좌)파리스의 화살을 맞은 아킬레우스, 페테르 루벤스 (우)뒤꿈치에 화살을 맞은 아킬레우스, gordonwaldman.com
신탁과 선택 : 아킬레우스의 자유의지
“만일 네가 트로이에 간다면
엄청난 명예와 이름을 얻겠지만 단명할 것이고,
가지 않는다면 오래 살겠지만 아무런 명예도 얻지 못하리라“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기 전에 아킬레우스에게 내려진 신탁의 내용이다. 보통의 신탁과 달리 일방적 예언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신들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선택하도록 여지를 두고 있는 것이다. 선택의 기로에서 주인공 아킬레우스는 주저 없이 ‘명예로운 삶’을 택한다. 트로이에서 운명을 다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명예’를 선택하고 전쟁에 나가며, 그 결과 죽음을 맞는다. 이 선택이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함께 <일리아스>에서 이야기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점이다.
신들의 의지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결정하는 아킬레우스, 예언의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에게 소중한 가치를 선택하는 아킬레우스, 그리고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아킬레우스의 모습은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의 우리에게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 <일리아스>를 움켜질 시간이다. 어떤 책을 골라야할지 모르겠다면 ‘자유의지’로 선택하라!
▲(왼쪽부터)서해문집,도서출판숲, 동서문화사, 그린비
글/ 기획홍보실 이미영 · 사진/ vario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