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해도 괜찮아.“ 억지로 뭘 해야 한다는 강박이 오히려 불안감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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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일상이 멈춰 선 지금은 트라우마 상황

자신과 주위에 “괜찮아, 네 탓이 아니야.” 말해줘야

 

 

“우울해도 괜찮다. 그게 정상이다. 뭘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지금은 멈춰 서서 나와 주변을 탐색하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견디다 보면 내일을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정신과전문의 정혜신 박사가 9월 9일 오후 2시, 서울시50플러스 남부캠퍼스가 마련한 유튜브 라이브 특강 ‘코로나블루로 지친 그대들에게’에서 “코로나19 상황에서 우울하고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심리상태다. 정신 차려서 뭘 해야 한다는 강박은 오히려 불안감 우울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올 초 코로나19라는 낯선 질병이 찾아왔을 때 이렇게까지 광범위하게 우리 일상을 파괴할 것이라고 예상한 이는 없었다. 독한 감기쯤으로 여겼고, 봄이면 지나가겠거니 했던 게, 9월인데도 수그러들 기미가 없다. 미증유의 역병으로 인한 일상의 파괴는 개개인의 삶을 앗아갔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정신적, 경제적으로 회복할 수 없는 재앙을 몰고 올 것이라는 예상이 공포를 넘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집단적 트라우마 본질은 ‘죽음 각인’

정박사는 코로나19로 개개인이 겪는 지금의 심리상태를 ‘트라우마’로 규정했다. 보통의 정신질환이 사람 내면의 심리문제에서 생기는 것과 달리 트라우마는 외부요인이 원인이 된다. 일가족이 자동차를 타고 가다 사고가 나서 나만 살아남았다면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라고도 불린다. 끝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19 사태는 개개인에게 재앙이다. 재앙은 불안과 공포를 몰고 오고, 무기력을 잉태한다. 현 상황에 대한 진단을 명확히 해야 치료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야기된 지금의 상황은 ‘집단적 트라우마’라는 것이다.

 

남부캠퍼스 북카페에서 정혜신박사가 코로나블루 극복 특강을 진행하고 있다.

 

“트라우마의 본질은 ‘죽음 각인’이다. 사람들은 대개 죽음을 의식하지 않고 지낸다. 지금의 삶, 미래의 삶만 생각하고 일상을 산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죽음이 내 앞으로 훅 들어오게 되면 큰 충격을 받는데, 지금이 그런 상황이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주위 사람에 의해 감염될 수 있고, 내가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 부주의로 주변을 힘들게 할 수도 있는 이런 불확실한 일상이 사회를 뒤덮고 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울리는 코로나확진자 안내문자, 끝없이 이어지는 관련보도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이들이 많다. 그게 죽음을 떠올리기 때문이라는 게 정박사의 진단이다. 트라우마가 무서운 것은 개인차가 없다는 것이다. 무차별적으로 누구에게나 정서적 상처를 입힌다.

 

그는 사람이 불안에 대처할 때 두 갈래 심리기제가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자기혐오와 남 탓이다. “여행업을 하는 분을 최근 만났다. 폐업했다고 했다. 이분이 이렇게 얘기한다. 부모님이 공무원 시험 보라고 했지만, 노는 거 좋아하는 성격이라 좋아하는 일 하면서 돈도 벌면 좋겠다 싶어 이 일을 벌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부모님 말을 들었어야 했다는 후회가 든다. 내가 판단을 잘못해 사업을 말아먹었다”고 하더라. 사람이 그렇다. 불안하고 무기력한 상황에 처하면 스스로를 물어뜯는다. 그러지 않으면 남을 미워하는 감정을 폭발 시켜 불안감을 해소하려 든다.

 

코로나블루 극복을 위해 지금은 자신을 보듬어주는 시간이다.

 

불안, 공포, 무기력함을 다스릴 방법은 없는가?!

트라우마는 개인이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정박사 진단이다. 길을 가다 벼락을 맞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 가늠할 수 없는 외력이 닥치면 본능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살길을 찾는다. 그런데 그게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간첩으로 몰려 고문을 당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고, 어제까지 멀쩡하던 애가 오늘 죽었다는 통보를 받았는데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이렇게 납득할 수 없는 일에서조차 납득할 만한 설명을 찾으려 한다. “내가 원래 재수가 없는 인간인가?” “내가 전생에 죽을죄를 지었나.” 가해자를 특정할 수 없는, 통제불가능 한 상황으로 상처를 입으면 나를 잡는 게 사람 심리라는 것이다. 불확실한 고통을 확실한 고통으로 바꾸려고 하는 게 사람의 심리인데, 그렇게 작동해서 이르는 결론은 내탓, 자기학대로 귀결된다.

 

“세월호 유가족 중에 그런 분이 계셨다. 많은 이들이 무너져 넋을 놓고 있을 때 이분은 ‘나라도 정신 차리자. 나마저 무너지면 남은 가족은 살 길이 없다’며 악착같이 회사 나가고 사람 만나고 정상인의 일상을 유지했다. 슬픔 분노는 애써 외면했다. 3년째 어느 날 이분이 무너졌다. 출근길에 죽은 아이가 훅 들어온 것이다. 그간 먼저 간 애의 고통을 외면했는데,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분은 이때부터 속절없이 쓰나미에 쓸려간다.” 집단적 트라우마 상태에서는 우울해도 괜찮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코로나19 사태에서 우울한 건 병이 아니다. 무기력함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을 몰아세우다 보면 부작용이 나타난다. 지금은 힘들어하는 스스로를 보듬어야 할 때라는 것이다.

 

정박사는 남편얘기도 꺼냈다. 평소 심근경색을 앓던 남편에게 어느 날 심정지가 온 것. 다행히 건강하게 돌아왔다. 물론 심장에 상당한 데미지를 가진 채. 그런데 뉴스에서 “기저질환자가 특히 위험하다.”는 얘기를 듣고 덜컥 겁이 났다. 그간 남편을 기저질환자라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남편이 코로나19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된 것. 자신과 남편이 이로 인해 우울증을 겪었다 해도 이는 병이라기보다 사람이 자기 한계를 느꼈을 때 갖게 되는 지극히 정상적인 감정이라는 것이다. 굳이 털어내려고 애쓸 필요 없이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한 단계 성숙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

 

그럼, 지금 뭘해야 하는가에 대해 그는 “습관적으로 뭘 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려라. 지금은 멈춰 있어라. 에너지를 비축해 두고 새로운 환경이 주어졌을 때 헤쳐나갈 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라고 조언했다. 지금은 지도 한 장 없이 오지에 떨어진 상황이라는 것. 주위는 온통 안개로 뒤덮여 분간이 안 되고 어디로 가야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럴 땐 움직이지 않는 게 상책이다.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스스로를 지키며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려야 한다. 조급함에 움직였다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

 

댓글을 살펴보는 정혜신 박사

 

이날 유튜브강의에는 예정보다 10분 늘어난 1시간 10분간 진행되었다. 250여명이 참가해 정박사의 강연을 들었고, 무수히 많은 댓글과 질문이 쏟아졌다. 오뚝이카레맘​님은 “저만 그런 게 아니었군요. 아 정말 위로되네요.”, Hyun-sook Choi님은 “​맞아요..모든게 내 탓인걸로 힘들어하고 있었네요.”, 나의음악모모​님은 “게으르고 나태하다 자책하고 있었던 마음을 들킨 것 같습니다.”, 오렌지자스민님은 “​아이도 공부한 게 헛수고가 될 거 같아 힘들다고 해요 혹시 죽을지도 모르는데.. 이러는 거 들으니 속상해요. ㅜ.ㅜ”, 루체님은 “​저도 좀 기다리면서 가만히 있고 싶은데, 주변은 자꾸 이 시대에 뭔가를 하라고 해야 한다고 하니까 너무 힘듭니다.” 등의 댓글을 올리기도 했다. 

 

250여명이 코로나블루 강의에 참여해 열띤 댓글로 공감을 표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