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초에서 앞치마를 두른 꽃미남으로
2012년 방영되어 큰 인기를 끌었던 ‘신사의 품격’은 사랑과 이별, 성공과 좌절을 경험하고 세상 어떤 일에도 미혹되지 않는 불혹을 넘긴 꽃중년 남자 4명이 펼치는 로맨틱 멜로 드라마다.
그 꽃중년이 2022년 50플러스 세대가 되어 ‘신사의 밥상’으로 돌아왔다. ‘신사’라 함은 점잖고 예의 바르며 교양있는 남자를 일컫지만, 그 신사가 앞치마를 두르고 서툰 솜씨로 가족을 위해 늦은 밤에도 칼질과 설거지를 태연스레 하는 머리 희끗희끗한 밥상쟁이로 변모하는 건 어지간한 용기가 있지 않으면 쉬운 일이 아니다.
1970~80년대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관통해서 살아 온 50플러스 세대에게 그간 상남자로 대변되는 ‘리처드 기어’나 ‘이대근’류의 남성성이 바야흐로 준수한 외모를 지닌 ‘요리 잘하는 남자’로 변신 중이다.
▲ 앞치마를 두른 신사. ⓒ 50+시민기자단 정종호 기자
# 센터의 자부심, 늘솜부엌
6월 28일 오후 늦게 50+시민기자가 찾아간 금천50플러스센터 6층 ‘늘솜부엌’(‘늘솜’은 ‘늘 솜씨 좋은’이라는 뜻)에서는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에 열정적인 ‘신사’들이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강사의 설명과 지시에 따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오후 6시 30분부터 8시 30분까지 2시간을 넘겨 진행된 이론과 실습이 버무려진 강의는 정해린 강사의 카랑카랑한 목소리, 학습지원단 선생님의 조교 같은 보조 활동(예를 들면 재료를 볶을 때 천정의 환기팬을 켜는 것, 각종 식자재 전달, 설거지 보조 등)과 칼잡이로서 의욕을 앞세운 수강생들의 열기로 가득 찼다.
이날은 파스타와 해당 소스, 사우전드 아일랜드 드레싱과 샐러드를 만드는 과정이었는데 수강생들은 스마트폰으로 강의 내용을 담기도 하고 즉석 질의응답을 통해 이해의 폭을 넓히기도 했다.
금천50플러스센터의 자부심이기도 한 시그니처 시설인 이 부엌은 강사용을 제외하고도 인덕션이 12개, 싱크대 개수대가 5개로 규모 면에서도 상당할뿐더러 집기나 그릇 모두 새롭게 장만한 것들이다. 한쪽에는 냉장고, 대형 커피머신 등이 있어 요리 외에도 커피, 맥주 등을 제조할 수 있다고 한다.
▲ 요리에 열심인 수강생들. ⓒ 50+시민기자단 정종호 기자
# 신사가 요리를 한다고?
수업에 참여한 박송원 씨는 내내 흥얼거리면서도 강사와 보조를 맞추며 재료 다듬기에 여념이 없었다. 창동에 살지만, 수업을 위해 오가는 긴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다고 하면서, 요리에 대한 기대와 즐거움이 모든 것을 상쇄한다며 일주일 내내 이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귀가한 후에는 반드시 복습(한 번 더 만드는 것)하고 본인의 요리로 체화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자랑도 숨기지 않았다. 특히, 해 보고 싶은 요리가 있는 센터 커리큘럼이 마음에 들어서 바로 신청해서 참여했다고.
고수길 씨는 직접 만든 요리를 집으로 가져가 가족들과 함께 맛있게 먹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고 하면서 다음 학기에도 반드시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강하게 된 동기도 아내의 추천이나 지인의 권유, 센터의 뉴스레터, 게시판 광고 등 다양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쉴 새 없이 식자재를 씻고, 칼질하고 데우고 조리하는 행위, 물과 불과 설거지와 씨름하는 행위는 즐기고 만족하지 않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더욱이 곧추서서 일하는 것은 막대한 노동력과 체력이 소모된다. 그래서 소위 유명 셰프는 다 남자들이 아닌지?
▲ 수강생과 강사와의 대화. ⓒ 50+시민기자단 정종호 기자
강의가 끝난 후 오후 8시 40분부터 강사와 수강생과의 강평을 겸한 대화가 이어졌다. 한 달간의 과정을 복기하고 보람 있었던 일과 개선사항을 피드백하는 과정이다. 수강생들은 이구동성으로 만족감을 표시하고 다음 기회에도 참여하겠다고 말했다.
# 신사의 밥상은 아빠의 밥상
정해린 강사와 일문일답을 나누었다.
▲ 정해린 강사와의 인터뷰. ⓒ 50+시민기자단 정종호 기자
▶ 본인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정 : 저는 9년 전부터 문화센터와 50플러스센터에서 한식을 비롯한 다양한 요리와 레시피를 소개하면서 수강생들과 호흡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동을 대상으로 한 요리 시간은 매우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 일반 요리학원과 센터 수강 과정은 어떻게 다른가요?
정 : 일반 요리학원은 요리를 전문적으로 배워 사업화하려는 분들이나 자격증을 따기 위해 오시는 분들이 많지만, 센터에 오시는 분들은 50세 이상으로 취미 또는 자신의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서 오는 분들이 대부분이라 온도 차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센터는 50플러스 세대 이상 모임이어서 수강생들 간의 공통점이 많고 생활에 여유가 있는 분들이라 과정을 빠르게 이해하고 적응하시는 편입니다.
▶ 50세 이후 남자들에게 요리는 어떤 의미인가요?
정 : 그동안 남편과 아버지로 살면서 억눌려 왔던 사회생활에서 벗어나 잠재된 욕구를 발산하는 신나는 기회이기도 하고, 집에서 요리하고 싶었는데 못하다가 공개된 장소에서 요리하니 떳떳하고 자신이 자랑스럽기도 한 거지요.
▶ 강좌에 참여한 수강생들에 대해 느낀 점은 무엇인가요?
정 : 의외로 남자분들이 손이 빠르고 섬세하세요. 과감하고 도전적이기 때문에 기꺼이 앞치마를 두르게 된 거라 생각합니다.
▶ 즐거웠던 점과 보람 있었던 일을 무엇인가요?
정 : 처음에 인덕션 온·오프도 할 줄 모르던 분들이 요리에 취미를 느끼고, 실력이 쑥쑥 늘고, 만든 요리를 드시지 않고 댁으로 가져가는 모습을 보면 강사로서 많은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 앞으로의 각오와 센터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정 : 50플러스 세대의 배움의 열기는 대단합니다. 이 열기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도록 다양한 형태로 확대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센터만의 장점을 바탕으로 더욱 알차고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셔서 강사와 수강생 모두 만족하도록 요청을 드립니다. 가능하면 8주 또는 12주 등으로 강의 시간을 확대 개편하는 것도 제안해 봅니다.
# 신사의 밥상, 삶에 대한 긍정과 진취적인 자세
신사의 밥상은 6월 7일 ‘매콤한 중국 사천식 덮밥’을 시작으로 ‘기양초부추로 만드는 전통요리’, ‘간편하게 만드는 일품요리’에 이어 6월 28일 ‘소스로 골라 먹는 면요리’ 강좌를 마지막으로 종료되었다.
‘신사의 밥상’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강의명을 정한 것은 그만큼 자랑할 만한 콘텐츠와 새로 단장한 주방 등 하드웨어가 자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면 활동이 중단되었던 지난 2년여의 공백을 만회하는 이상으로 올해 시도한 요리강좌 ‘신사의 밥상’이 롱런 하기를 기대해 마지않는다.
▲ 늘솜부엌. ⓒ 50+시민기자단 정종호 기자
늘솜부엌 외벽에는 미국의 국민 화가로 불리는 모지스(1861~1961) 할머니(그는 75세 무렵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가 한 말이 적혀있다.
“지금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입니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이죠.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50+시민기자단 정종호 기자 (powerarcdong@hanmail.net)